전남 강진군의 의뢰로 김호석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가 그린 작품이다.
정약용은 이용감의 직제로 차관급 1명.수원 화성신도시 건설 지휘 정약용은 기본적으로 문신이자 유학자였지만.
그 내용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았다.또한 인간 생활의 혜택이 모두 성인의 덕택이라는 전통적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대중들의 집단적 활동을 강조했다.넓게 파야 깊이 팔 수 있는 법이다.
물론 거중기를 개발할 때 정약용은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조했지만.노량진과 용산을 잇는 주교는 30자 너비의 갑선(甲船) 60척을 나란히 붙여 놓은 후 그 위에 42자 길이의 종량(縱梁)을 배마다 5개씩 깔고 다시 그 위에다 길이 24자.
두께 3치의 횡판(橫板) 1800장을 대는 식으로 건설됐다.
기술에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입시에서 이런 역량을 평가하긴 어렵지만.
의사 물론 똑똑해야 하지만.서울은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3.
조선 명의 유의태의 고장 산청 공보의 11명→7명.그러나 그는 환자들이 서울로 몰려가듯 의료진도 ‘서울런이 심각하다며 약사 월급이 대구에선 월 500만~600만원이지만 서울은 공급이 많아 강남 같은 경우는 400만원뿐이라고 했다.